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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YMCA 초대 총무 김태련



대구(大邱) 사람으로서 기독교(基督敎)인이다. 1919년 3월 8일 대구(大邱) 서문(西門)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권의윤(權義允)·김영서(金永瑞)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에서는 1919년 2월 24일 경상도 독립만세운동의 연락책임자였던 이갑성(李甲成)이 대구에 내려와서, 제일교회에서 기독교계의 유지 이만집·이상백(李相柏)·백남채(白南埰) 등과 만나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월 2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을 통하여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면서부터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만집·김영서·이상백·백남채·권의윤·정재순(鄭在淳)·정광순(鄭光淳)·최상원(崔相元)·최경학(崔敬學) 등과 함께 만나 서문 장날인 3월 8일 오후 3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고, 각자가 주민과 학생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는데, 그는 기독교 신도들의 규합을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대구시내의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 학생들에게도 연합시위를 일으키기로 연락하여 제휴하기로 하였다. 3월 6일에는 이갑성이 이만집에게 보낸 독립선언서를 전해 받고 이를 집에서 다시 등사하고, 「대한독립기」라고 쓴 큰 깃발과 크고 작은 태극기 40여매를 제작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거사에 앞서 3월 3일 홍주일(洪宙一)이, 3월 7일에는 백남채가 일경에게 예비 검속되어 주동인물들을 긴장시켰으나, 거사 계획은 변함없이 추진되었다. 3월 8일, 아침 일찍부터 도청 정문 등 요소에 태극기와 격문이 살포되었으며, 오후 3시경 그는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서문외 장터에 나아가 독립만세 시위에 참가하기 위하여 각지에 몰려온 학생·일반주민 등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감격에 벅차 울먹이는 가운데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어서 그는 시위군중들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가지를 행진하였는데,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서 앞의 저지선을 뚫고 중앙파출소 앞을 돌아 달성군청(達城郡廳)앞 삼각지에 이르렀을 때, 6대의 기관총으로 무장하여 대기중이던 일본군 80연대와 대치하게 되어 부득이 행진을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일본 헌병과 경찰은 시위대열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시위군중을 구타하며 검거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그도 체포되었으며, 함께 일군경에게 대항하던 아들 김용해(金湧海)는 일제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고문을 받고 빈사상태가 되어 가출옥하여 3월 29일 끝내 순국하였다. 이때 체포된 그는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9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고등경찰요사 23·24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1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48·350·351·352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64·1268·1269·1270·1274면



공적내용은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서 발췌

http://jeju.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2134&ip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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